사무엘상 20장 1절 - 11절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오늘 다윗이 사무엘을 떠나 요나단을 찾아갑니다.
그에게 사울이 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억울함을 하소연합니다.
요나단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위로합니다.
다윗은 사울과의 식사 자리 참여 여부를 놓고 시험해 보기를 원합니다.
다음날이 월 초하루인데 그 날은 사울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는 날이지만 참석하지 않고 며칠 숨어있을 것을 제안합니다.
그 때 사울이 다윗을 찾게 될 때, 요나단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고향에 방문하도록 다윗을 허락했다고 대답하게 합니다.
만약, 그것을 사울이 좋게 여기면 요나단이 생각한 것처럼 오해한 것이 될 것이고,
반대로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음으로 화를 내면 다윗을 죽이고자 함이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지금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정확한 마음을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윗은 쫓기면서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고 있고 더욱이 요나단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나단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아버지를 모함하는 다윗을 보며 불쾌할 수 있음에도
그는 오히려 다윗을 위로하며 진심으로 그의 말을 경청하며 안심시킵니다.
이것을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 지를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그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전하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수도 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우리를 향한 그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의 관심사는 온통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그 진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온전히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아무리 진심을 보여 주어도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품이 되지 않으면 늘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사랑을 보여 주셨음에도
그 사건이 내게 전부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랑을 이해하기에 거룩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십자가 사랑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머리로 이해가 되고 가끔 십자가를 생각하며 심지어 그 사랑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성품의 한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성품인 거룩함의 부재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이 그만큼 그 사랑을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속에 흐르는 죄 덩어리를 흔적 없이 녹이고도 남는
십자가 보혈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기간을 대하면서, 우리의 영적인 성품이 얼마나 주님을 닮아 있느냐에 따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내게 그만큼 실제적인 사랑으로 다가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품은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사랑을 때론 무덤덤하고 냉랭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구원 얻는 도구에서 만족하고 멈춰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십자가가 그 의미 이상으로 그들을 이끌지 못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구원의 조건을 넘어 그분의 삶을 통째로 부어 주신 사건입니다.
우리를 위해 그분의 인격과 진심과 열심을 다하신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가운데 진정 진심이 있는 지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아직도 조건에 머물러 있다면 결코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거룩함을 향한 도전의 삶입니다.
비록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주님은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닮아야만 알 수 있는 깊이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을 알 때, 오늘 다윗을 신뢰한 요나단처럼 비로소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변함 없는 신뢰가 주어지리라 믿습니다.
서비스 링크